강호를 뒤흔든 거대한 소용돌이의 시작은 사천이 가진 부유한 곡창지대를 이루어낸 그 곳, 도강언(都江堰)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사건이었다. 도강언은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와 도보로 불과 반나절의 거리에 있었고, 성도(成都)는 정파이기에는 너무나 손속이 잔혹하고, 사파라 칭하기에는 그들의 행사에 반론의 여지가 없는 곳, 단일세가로 능히 구파일방 및 거대 사파와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저력의 문파, 바로 당문의 본가(本家)가 있었다.
도강언이 당문의 관할 아래 무림인들의 행사(行事)가 조심스러운 지역임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사천의 풍족한 농산물 생산의 중추인 수리시설이 농민의 땀과 함께 흘러 넘치던 여름, 하나의 죽음이 도강언 주민들에게 발견되었다.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 사소한 오해가 빗어낸 결과에 안타까워하는 주변 지인 외에 어느 누구도 이 일을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다. 허나 이 사건 3개월 후 혈사방(血死幇)과 당문 혈수대(血手隊), 혈사방과 용문상단(龍門商團) 간의 혈전이 성도를 중심으로 발생하면서 숨겨진 진실은 밝혀지기 시작한다. 시신의 주인공은 이식이라는 약관의 청년으로 도강언의 수리시설의 안전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하부관리였다. 공식 직함을 받고 녹을 받는 정식관리는 아니었지만, 온화한 성품과 성실한 일 처리로 근처 농민과 관리관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식에게 닥쳐온 어두운 그림자는 갑자기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무더운 날씨에도 경작지를 살찌울 수리시설의 점검을 위해 관도를 지나던 그는 혈사방도들의 행사(行事)를 목격하게 되었다. 혈사방의 반도와 그들을 추적한 혈사방도 간의 다툼이었고, 이는 무림인이 아닌 그가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상황이 끝난 후 수리시설 내에 흩어진 시신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수리시설 내에서 죽어간 시신을 그대로 두어 중요한 농경수가 오염되는 것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옮기던 시체에서 떨어진 죽간(竹簡)을 무심코 수습하면서 혈사방의 심문을 받아야만 했다. 혈사방의 반도는 혈사방의 중요한 내부 문서를 빼가던 중이었고, 혈사방의 운명을 걸고 방주 이하 모든 방도들이 수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지한 죽간으로 인하여 반도와의 관계를 추궁 당하던 이식은 심문 과정에서의 고문으로 얻은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니, 그의 시신이 버려지고, 발견된 곳이 그가 죽간을 얻은 수리시설 옆 갈대밭이었다.
갈대밭에서 이식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지나던 농민이었고, 근처의 많은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나,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은밀히 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긴 것은 성도 주민이라면 아니 사천성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알아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문 수석총관(首席總管) '천수서생(千手書生) 당걸(唐傑)'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왜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그의 창백한 안색과 부릅뜬 눈, 피가 배어나올 듯 움켜진 두 주먹으로 격앙된 그의 심사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아미산(峨嵋山) 초입에서 펼쳐진 혈전! 넓은 공터 주변에 쓰러진 혈사방도의 사망자는 27명인 당문 혈수대의 3배에 달했고, 중앙에서는 혈사방주와 당걸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마침내 혈사방주의 심장에 핏빛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을 꽂은 당걸은 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혈육의 복수를 이제야 이루었노라고……. 이식은 당걸이 사모하였으나, 평민의 자식이라는 신분차이로 혼인하지 못한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자식의 성장을 지켜보고, 그의 올바름에 흐뭇해하던 당걸은 이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고 드디어 이를 이루어낸 것이다.
혈사방과 당문의 다툼은 강호에서 흔히 발생하던 분쟁이었으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혈사방주의 죽음으로 당걸의 복수와 은원은 해결되었으나, 정사 중간의 당문이 사파의 한 축을 이루던 혈사방을 멸문지경까지 몰아감으로써 파급된 문제는 시간을 두고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혈사방과 크고 작은 연계를 이루던 거대사파들은 풍족한 사천성에서의 교두보를 잃음으로 인하여 혈사방과 당문의 분쟁을 묵과할 수 없었고, 정파 세력 중에서도 혈사방에 은밀히 자신들의 치부의 해결을 의뢰하고 문파 이익을 도모하던 문파들이 죽간의 내용과 혈사방 내의 문서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괴멸 직전의 혈사방 본가에서 혈사방의 부방주를 비롯한 남은 방도들과 소림 속가계열의 용문상단 간의 전투로 나타났고, 아미산 전투의 승리를 당문의 이익으로 마무리 지으려던 당문 세력까지 가세하여 혈사방의 멸문과 함께 폐허가 되었고, 용문상단 전위대(前衛隊)의 괴멸, 당문 혈수대의 과반수 사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혈사방의 멸문은 결국 거대 사파세력의 사천 진출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용문상단으로부터 해마다 거금의 지원을 받아오던 소림을 비롯한 정파세력 또한 전위대의 괴멸로 전투력을 상실한 상단에 자신들의 힘을 지원하여 그 동안 당가(唐家)의 터전인 사천을 지켜야 하는 그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한 개인의 복수로부터 거대 문파의 이익을 위한 격전지로 변해버린 사천성!
잦은 안개와 중원 제일의 풍요를 가진 사천의 운명은 누구의 손에 머무를 것인가……
- 제 4장 우화등선(羽化登仙) [새로운 도전]
- 제 5장 역천지도(逆天之道) [전설의 영웅]
- 제 6장 천상비록 [잊혀진 이야기]